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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t bille

  • 작성자: geoworld
  • 등록일: 5월 10, 2015
  • 분류:

구엄소금빌레

2006년 촬영한 구엄 소금빌레 VR파노라마

조선시대 제주도의 소금은 어디에서 마련하였을까?

제주도 소금에 관한 기록은 조선 중종15년(1520) 『제주풍토록』, 중종25년(1530)의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 선조실록 4년(1571) 정해조, 선조 34년(1602) 김상헌의 『남사록』, 효종2년(1651) 이원진의 『탐라지』에 남아있다. 종합해보면 지형, 바닷물의 염도, 솥을 만들 철이 생산되지 않는 원인 때문에 소금이 귀하다고 쓰여있다. 조선총독부(1908) 『한국수산지』에는 구엄염전의 제염기술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구엄리 부근에는 연안의 광대하고 평탄한 암석 위에 니토(泥土,진흙)로 여러개의 소제(小堤)를 만들어 증발지로 삼는다. 우선 그 해빈 가까운 증발지에 해수를 담는다. 차례대로 이 해수를 상방의 증발지로 옮겨나간다. 최후의 증발지에 이르러 그 농도가 20도 이상에 달하면 이것을 전오(煎熬, 졸이고 볶다)한다. 그 농도는 선충(船蟲)을 물 속에 넣어 검정한다.》

제주도의 너럭바위, 평평한 암석을 빌레라 한다. 빌레에서 소금을 만든다면 그 암석을 소금빌레라 한다. 애월읍 구엄마을은 조선총독부 한국수산지(1908)에 8887평의 소금밭이 있고 1년에2만8,800근의 소금이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하나의 염전은 보통 25평, 염전마다 여섯 개의 증발지를 마련하고 하나의 증발지는 4.2평 안팎이었다. 평평한 암석이라고 하지만 균열이 있는 틈을 따라 찰흙으로 둑을 쌓았고, 둑의 폭과 높이는 약 15cm, 이 둑을 ‘구렁’이라고 하고, 둑을 만드는 일을 ‘두렁막음’이라고 하였다. 두렁을 막아서 생기는 증발지는 ‘물아찌는돌’(물을 앉히는 돌) 또는 ‘호겡이’라고 하였다.

증발지에서 직접 소금을 만들기도 하였다. 곧 천일염이었다. 천일염을 만드는 증발지를 ‘소금돌’ 이라고 하였다. 하나의 염전이 거느리는 여섯 개의 증발지 중 간수를 만드는 증발지가 넷이면 천일염을 만드는 증발지는 둘이었다. 간수를 두고 ‘간물’ 이라고 하였다. 증발지에서 ‘간물’을 만드는 일을 ‘자춘다’고 하였다. ‘자추다’는 허벅(하나의 허벅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은 약 20리터)에 바닷물을 담아 증발지에 부어 담아놓고 햇볕과 바람으로 증발시키는 일을 말한다.

바닷물이 어느 정도 증발하여 염분농도가 강해진 소금물을 ‘간물’이라고 하고, 이 ‘간물’을 따로 정해진 ‘호겡이’에 옮겨 놓는다. 간수를 만드는 동안 비가 오거나 날이 흐려 최종 증발지에서 천일염을 만들지 못하면 ‘혹’이라는 별도 저장소에 보관하기도 했다. 지금도 ‘구엄소금빌레’의 한 켠에는 찰흙과 돌멩이로 만든 붙박이 항아리가 있다. 겨울철처럼 일조량이 적은 때에는 ‘혹’에 보관했던 ‘간물’을 솥에 넣어 불을 지펴서 소금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생산된 소금은 제조방법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는데, 솥에서 달여 만든 소금을 ‘삶은소금’과 ‘호겡이’에서 끝까지 증발시킨 ‘돌소금’이 그 것이다. ‘돌소금’은 ‘삶은소금’보다 넓적하고 굵고 맛도 뛰어나 인기가 좋아 훨씬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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