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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대(油然臺)와 어은동(魚隱洞)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002-08-14 (수) 14:24 조회 : 1400
유연대(油然臺)와 어은동(魚隱洞)
커다랗게 곡선을 그리며 엔굽이쳐 흐르는 전주천과 어깨를 나란히한 채 한참을 함께 달려가는 기다란 산자락을 시내 남 서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흥중 ·고교 뒤에서부터 시작하여 도토리골과 어은골을 거쳐 진북사(鎭北寺)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뻗친 고만고만한 표고의 산줄기를 가리켜 유연대라 부른다.
'유연' (油然)이란 단어의 사전적 풀이는 퍽이나 다양한 편이라서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좀 거시기하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모양 또는 저절로 일어나 형세가 왕성한 모양을 가리키기도 하고, 잘 전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양을 나타내기도 하고, 다른 것에 개의치 않는 태연한 모양을 뜻하기도 하고, 여유 있고 침착한 모양을 이르기도 하고,속에 담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모양을 말하기도 한다.
유연대란 명칭의 유래가 위에 열거된 다양한 뜻풀이들, 앞쪽과 뒤쪽 사이에 언뜻 모순이 느껴지는 그 복잡한 의미들 가운데 과연 어느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유연대의 인상을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복합적인 의미로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그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뜻의 단어를 차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전주천 북쪽,그러니까 시내 쪽 천변 어느 지점에 서서 유연대를 바라다볼라치면 명칭에 얽힌 의문이 웬만큼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배경에 그보다 더 높은 산이 없이 탁 트인 스카이라인을 머리 위에 얹고 있는 자연 조건 덕분에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뭉게구름이 피어나듯 왕성한 형세를 느낄 수도 있겠다. 야트막한 구릉의 연속인 데다가 전주천의 물길에 막혀 그나마 진로를 차단당하기도 하고 밑두리를 침식당하기도 하는 그 옹색한 형편 쪽에 보다 더 중점을 두는 시각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 유연이란 말 속에 포함된 여러 가지 뜻들을 한데 묶어 놓은 듯 다면체의 인상을 지닌 채 유연대는 자유자재하고 능소능대하면서 스스로 조화를 부리는 산줄기 같기도 하다.
어쩌면 유연대는 처음부터 제 진면목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을 달고 오랫동안 온고을 사람들 앞에서 그처림 행세해왔는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연대는 사실 뭉게구름처럼 왕성하게 피어난 아름답고 귀중한 것들을 속에다 감춘 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능청을 떨어온 겸손한 산이다. 어은골 역시 마찬가지여서 잉어 같은 대어를 품안에 숨긴 채 유연대 산자락 안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수줍은 땅이다.
지금도 유연대 일윈에는 각급 교육기관들이 다수 자리를 잡고 있다. 예수간호대, 기전여대, 한일신학교, 신흥중고, 기전띠중고, 전주여상 그리고 그 너머의 근영여중고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유연대가 온고을에서 교육의 기능을 떠맡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유연대에는 호남의 인재를 양성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연대 남쪽 산자락 화산동에는 한때 전주향교가 있었다. 그러나 부성에서 너무 거리가 먼 데다가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옛 법도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1673년(선조 35년)에 교동으로 향교를 옮겼다.
그 후 1624년(인조 2년)에 향교 자리에 화산서원(華山書院)이 창건되었다. 화산서원은 전주부윤을 지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전라관찰사를 지탠 규암 奎菴) 송인수(宋麟壽)를 배향하여 그들의 높은 학문과 덕망을 오랫동안 기려 나오다가 1869년(고종 6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지되었다. 옛날 서원이 있던 자리에 세운 '화산서원비' 는 1984년 지방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 었다.
또한 유연대는 제도와 규모를 갖춘 고등교육 기관인 희현당(希顯堂)도 거느리고 있었다. 희현당은 1700년(숙종 26년) 당시 관찰사 김시걸(金時傑)이 생원과 진사 들의 모임 장소였던 사마재(司馬齋) 자리(현재의 신흥고교 자리)에다 창설한 학당이다. 강당을 짓고, 도서를 비치하고, 당규(堂規)를 제정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주방을 마련하여 서생들의 숙식을 돕는 등으로 학당을 운영한 것을 보면 오늘날의 학교 제도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해마다 봄반과 가을반으로 나누어 전주에서 10명, 도내에서 20명,도합 30명의'학생을 선발해서 교육을 시켜왔다
니까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호남의 인재들이 이 희현당을 통해 배출되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희현당은 오랜 사색당쟁의 여파로 운영 주체인 선비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바람에 그 푸르고 아름답던 초심을 끝까지 살리지 못한 채 퇴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1907년에 미국인 선교사 레이놀즈 부부에 의해 근대식 교육기관인 신흥학교가 창설되면서 한때는 희현당 시설이 신흥학교의 교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구한말 전라감사로 부임한 매국노 이완용이 희현당 자리를 명당이라 하여 제 조상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욕심을 내는 바람에 귀중한 문화재로 남아 있던 희현당 건물은 그나마 아예 헐리고 말았다
현재 신흥학교 남쪽에는 1707년(숙종 33년)에 세운 '희현당 사적비'와 1743년(영조 19년)에 세운 '중수사적비'가 남아 있어 지난날 그 곳이 청운의 뜻을 품은 선비들의 차문 도장이었음을 묵묵히 증언해 주고 있다.
유연대에는 또 이영남(李英男) 장군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영남은 약관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수군 소속으로 원균의 휘하에서 싸워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에 의해 참모로 발탁된 다음 그의 휘하에서 한산도, 부산포, 당항포 해전에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수훈을 세웠다.
이영남은 정유재란 당시 옥고를 치르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에 의해 가리포 첨절제사 겸 조방장으로 임명되어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후 이듬해 노량대첩에서 이순신과 함께 28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전사했다. 사후 이영남은 병조판서에 추증되는 한편 예수댕원 근처에 있는 선충사(宣忠祠)에 제향되었다.
유연대의 꼬리가 잦아드는 북쪽 끝자락, 어은골과 서신교 사이 가파른 곳에 고찰 진북사(鎭北寺)가 위치해 있다. 진북사는 부성 주변 사방에 자리잡고 있음으로써 성을 수호했다는 전주의 사고사 가운데 하나로 일명 북고사(北固寺)라 일컫기도 하고 속칭 '부엉바위절'로 통하기도 한다
진북사의 창건 내력과 시기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며, 1790년대에 작성된 (호남읍지)에 처음 이름이 등장하는 절이다. 경내에는 전라감사를 지낸 이서구(李書九)가 터를 잡았다는 산신각이 가장 오래 된 건물로 남아 있으며, 법당은 근래에 새로 지은·건물이다. 애당초 법당에는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빈 건물로 남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절을 지을 당시 워낙 바위투성이의 험한 비탈이라서 건물을 들어앉힐 자리가 없어 '호랑이아가리터'라 불리는 곳을 파고 깎아 법당을 세운 다음 호랑이의 턱에 해당하는 법당 뜰에 석축을 쌓았기 때문에 바로 그 턱 쪽의 석축을 넓히려 할 때마다 번번이 무너지곤 했다고 한다.
도토리골은 조선 시대에 진상품인 한지를 만드는 지소(紙所)가 있던 곳이다.

- 윤흥길의 전주이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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