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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전주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002-08-19 (월) 17:42 조회 : 3239
고려시대의 전주

고려의 태조 왕건은 후삼국시대의 쟁패과정에서 신라를 평화적으로 복속하고 후백제를 공략하여 태조 19년(936) 후삼국의 재통일을 이룩하엿다. 태조 왕건은 후백제 멸망 후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는 군대를 주둔시켜 통제하는 내용인데 4년뒤인 태조23년(940)전국의 주부권현을 개편하면서 전주로 다시 개칭하여 호남의 중심적ㅇ 역할을 유지하였다.

고려시대 전주를 포함한 전라도지역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자료는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이다. 이는 태조 왕건이 943년 67세를 일기로 죽으면서 남긴 것으로 이것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 맞지 않는다하여 후대의 위작으로 보는 설이 있다. 특히 제8조 차현(車峴)이남, 공주강밖의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문제가 된다. 위작설의 근거로다음의 몇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태조대에는 호남인들이 많이 등용되고 있어 이 같은 내용의 훈요십조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호남인으로는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예견했던 영암의 최지몽이 이었고 태조 공신으로 책봉된나주의 나총례, 광주의 김길, 영광의 전종회 등이 있었다. 또 왕건이 존경하고 흠모하던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참선이 영암 출신이었고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려다 죽은 신숭겸의 출신지도 곡성이었다.
둘째 왕건은 나주를 그의 강력한 세력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나주 오씨의 소생인 태자 무가 왕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즉위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세째 태조 이후에도 많은 전라도 출신 인물들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요직에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전주 출신인 유방헌은 광종조에 급제하여 현종대에 내사시랑평장사(정2품)에까지 올랐고 영광 출신인 김심언도 성종대에 급제하여 내사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고부 출신이었던 장연우도 현종대에 호보상서를 지냈다. 그런가하면 장흥 출신인 임의와 그의 아들 임원후는 최고직인 문하시중(종1품)을 지냈으며, 그의 딸이 인종의 왕비가 되어 의종, 명종,신종을 낳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현종대이후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실록이 불타버리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 7대실록을 재집필하게 되었는데 이 때 전라도지역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은 셩종과 그 주변세력들이 이같은 차별조항을 삽입한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조항을 살펴보면 대체로 태조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훈요십조가 후대의 조작이라는 설보다는 태조당대의 인식으로 보는 것이학계의입장이다. 그렇다면 제 8조의유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차현은 현재의 차령으로 천안과 공주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공주강은 현재의 금감을 뜻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본다면 차현이남 공주강 밖은 현재의 전라도 뿐 아니라 충청도의 공주, 홍성지역 이남도 포함된다. 나아가 청주지역도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 충청도 지역은 왕건에 대해 순종과 반역을 거듭한 지역이다.

따라서 이 조항은 주로 이 지역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 후백제의 근거지였던 광주지역과 끝까지 항거했던 신검의 도읍지인 전주지역도 주대상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통일 신라 시대에 9주중 하나인 무주의 치소였던 광주 지역이 고려조에 들어와 해양현으로 강등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주 지역은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피난할 때 전주절도사 조용겸의 청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태조께서도 싫어한 곳이라 하여 들르지도 않고 남행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결국 훈요십조 중 제8조에 나오는 말은 전라도 지역에만 국한 된 말은 아니고 충청도의공주, 홍성 등 지역과 광주, 전주 등 일부지역에 국한된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유훈도 엄격하게 지커진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한 통치자의 개인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다. 후백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후백제의 민심과 전통의식에대한 왕건의 두려움을 표현한 것으로 오히려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지나간 역사의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고 현재와 연결시킨다 하더라도 호남인들의 꿋꿋한 자긍심과 저항정신의 결과라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려 전기에는 전북 출신 인물들이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태조의 훈요십조에 대한 영향과 더불어 이 지역이 후백제의 핵심지역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만 전주 출신이었던 유방헌이 있을 뿐이다.
전북 출신 인물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대개 무신집권이 이후의 일이었다. 전주 최씨의경우 인종대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에 나아간 최균이 초위총란때에 순절하면서 무신정권때에 우대받았다. 그의 후손인 최보순 최윤개 최성지 최문도 등이 고위 관직에 올랐다. 특히 그들은 여러 차례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무신정권하에서 인재선발에 큰 몫을 하였다.
전주이씨 가문은 고려전기 이영 이광필 부자와 같은 화가를 배출하기도 했으나 번성하게 된 것은 이의방이 무신정변에 참여하면서였다. 무신정변의 핵심세력이었던 이의방은 동료였던 이고를 제거하고 최고집권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특히 이의방의 아우였던 이린은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선조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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